산수유농업의 시작

구례 산수유 나무는 어떻게 ‘대학나무’가 되었을까?

산동지역의 산수유나무는 모두 주인이 있습니다. 집 주변은 물론 시냇가나 길가 혹은 밭둑길에 있는 것도 다 주인이 있는데 주민들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대를 이어 가보(家寶)처럼 산수유나무 한그루 한그루를 심고 가꾸어왔습니다. 특히 산수유열매를 수확해서 장에 팔기까지 열 번 이상 손이 가는 고된 산수유농업을 이겨냈습니다.

약 1,000여 년 전 중국에서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은 이후 현재까지 산동지역의 주민들은 벼농사가 끝나는 늦가을이 되면 붉게 익은 산수유열매를 따기 위해 산수유나무 밑에 덕석을 깔고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땁니다.

수확한 산수유열매는 늦은 저녁 가가호호 사랑방에 아이들과 아낙네들이 모여 도리반상에 쌓아두고 턱 아래 그릇을 받쳐 이로 산수유열매의 씨를 발라내는 작업을 겨우내 합니다. 그래서 “산동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산수유를 까느라 앞니가 다 닳아 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는 말이 지역 내 전해질 정도입니다.

산동에서 수확한 산수유열매가 고급 한약재로 잘 팔리던 시절, 지역에서는 산수유나무 한두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 하여 ‘대학나무’라고도 불렀습니다.

구례 산수유 마을

구례 산수유 농업의 역사성

산수유농업의 시작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사는 처녀가 구례 산동(山東)으로 시집을 오면서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가 선대부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산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되었으며 산동면 계천리 계척마을에는 이때 들여와 심은 최초의 산수유나무로 추정되는 1,000년 수령의 산수유나무가 있습니다. 지역사람들은 이 나무를 ‘할머니나무’라 부르고 있으며 구례군에서 산수유 시목(始木)으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건넛마을인 원달리 달전마을에 있는 수령 300년의 ‘할아버지나무’도 할머니나무와 비슷한 1,000년 이상 된 고령목에서 나서 자란 나무로 지역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산동면 곳곳에는 수백년 수령의 산수유 고목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산수유 시목지에서는 매년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산동지역에서 산수유농업이 처음 시작된 시점은 삼국시대로 1,200여 년 전 중국에서 산수유나무를 들여와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권2 기이(記異)」에 신라 48대 경문왕(861-875년) 때 산수유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오직 두건을 만드는 한 사람이 알고 있었으나 평생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의 귀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면 대나무 소리도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의 귀와 같다.”고 들렸습니다. 경문왕이 이를 알고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비로소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고 들렸다고 합니다.
고문헌에 기록된 구례 산수유는 「산림경제」, 「동국여지승람」, 「승정원일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산수유가 공납을 위한 지역의 특산품으로 재배되고 ‘한약재’로도 처방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근세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인 1938년 동아일보에 구례에 산수유조합이 창립된 기록, 1939년 구례지역 특산품으로 산수유가 경쟁 입찰에 부쳐진 기록과 구례지역 산수유 출하량이 약 9ton에 달했다는 기록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로부터 구례지역은 산수유가 지역 특산품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척마을 할머니 나무

계척마을 할머니 나무

달전마을 할아버지 나무

달전마을 할아버지 나무

산수유 군락지의 형성
계척마을 할머니 나무

구례군 내에서도 산동지역은 전체면적의 83.9%가 임야로 경작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산간지역입니다. 이렇듯 농사짓기 불리한 지형적 조건을 극복하고 산동면 주민들은 약 천 년 전부터 지역의 기후를 이용하여 생계유지 수단으로 산수유를 재배해왔습니다.

산동지역에서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식량작물, 채소 등을 재배할 경작지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며 산수유는 자연스럽게 경작지와 집 주변 돌담, 마을 어귀, 개울가, 산 구릉지 등 공한지에 주로 심게 되었습니다. 공한지 중에서도 모래와 흙이 섞인 사질양토를 골라 산수유나무를 심었으며 주로 산수유나무(30~40년 수령)에서 떨어진 열매의 씨앗에서 자연 발아한 묘목을 농가에서 관리하기 용이한 마을 인근에 옮겨 심었습니다. 산수유농업 자체가 겨우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지역 내에서도 서민계층보다 머슴을 거닐고 있는 부잣집에서 산수유나무가 많이 재배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여순사건(1948년)을 거치면서 산수유나무가 불태워지고 많이 잘려나갔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정부의 정책 사업에 의해 산수유 묘목이 농가에 무상 보급되면서 산동면 곳곳에 산수유나무가 다시 심겨졌습니다. 1970~80년대 들어 이농현상으로 생긴 빈 집터와 휴경지를 활용해 산수유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점차 확대되면서 현재 모습의 산수유군락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산동주민들

산동면 전역에 넓게 분포하는 산수유군락지는 지역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산동주민들의 절박함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구례군의 총면적 443.2㎢ 가운데 임야가 342.5㎢로 77.3%를 차지하고 있으며 답 43.0㎢, 전 19.4㎢로 경지면적은 14.1%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동면은 관내 8개 읍·면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총면적 101.3㎢ 가운데 임야가 83.9㎢로 82.8%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지역으로, 경지면적은 11.7%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경작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업환경에서 산동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약 1천여 년 전인 11세기경부터 집 주변과, 마을 어귀, 산 구릉지, 개울가 등의 공한지에 산수유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산동지역에서 산수유농업이 시작된 이후 산수유는 벼, 보리 등 잡곡농사를 보조해주는 부업으로 해왔습니다. 1970년 새마을운동 이후 안정적 농업생산량 확보가 용이해지면서 주 소득 작물로 벼농사보다 수익이 높은 산수유나무를 빈 집터, 휴경지 등까지 확대하여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산동지역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벼, 보리농사를 짓고 난 후 농한기 없이 바로 산수유 농사가 시작됩니다. 산동주민들은 늦겨울까지 고생하며 수확한 산수유를 건조·가공해 한약재로 시장에 팔거나 용방, 광의 등 인근지역에 가져가 쌀과 채소로 교환해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는데 쓰기도 했습니다.

산수유 농사는 열매 수확해서 팔기까지 모두가 수작업이라 농사 자체가 고역입니다. 나무에 올라가 매달려서 열매를 털어 따내야 하고 바닥에 떨어진 열매는 검불(잎, 나뭇가지 등)을 골라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일은 건조하면서 씨를 발라내는 작업입니다. 오래전부터 산동 처녀들과 아이들은 입으로 직접 산수유열매를 씨와 육질로 분리하였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나이들 때까지 앞니로 이 작업을 해서인지 산동 처녀들은 입모양만 봐도 금방 알아보기 쉽다고 했습니다.

수확작업

수확작업

제핵작업

제핵작업

건조

건조